2017. 4. 17. 20:04ㆍ:: Review /동인지
2016년 5월 31일 작성했던 글.
얇은 책 두껍게 읽기 : abgrund, ABGRUND - Jenseits von Gut und Böse
I. 서문
II. ABGRUND
III. 선악의 저편
1. 도덕의 두 가지 유형
2. 선악의 저편으로
IV. 노예와 주인
V. 심연 속에서
I. 서문
ABGRUND - Jenseits von Gut und Böse (이하 ABGRUND) 는 2012년 8월 코미케 82에서 발간된 서클 abgrund의 동인지입니다. 네, 서클명과 책 이름이 같습니다. 'Abgrund'는 독일어로 '심연'이라는 뜻이고 'Jenseits von Gut und Böse '는 '선악의 저편'으로 번역됩니다. 이쯤 되면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선악의 저편'은 유명한 독일 철학자 니체의 저서 중 하나에요.
ABGURND의 후기 첫 페이지의 인용문을 읽으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워낙 여기저기서 인용되어 니체를 모르는 사람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이 경구도 선악의 저편 4장 146절에 등장하는 잠언이에요.
그러면 성인향 에로 동인지와 니체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작가가 이 32페이지짜리 얇은 책의 제목을 ABGRUND로, 부제를 선악의 저편으로 삼고 후기에 니체를 경구를 인용해 놓은 이유는, 사실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작가가 후기에 쓴 '스스로로서는 가장 잘 된 책이라고 생각한다'는 글과, 오토코노코 책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말, 이 책이 예고했던 전작 Colorful 시리즈 3권 대신 갑툭튀한 작품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몇 가지 상상과 재해석을 할 수 있을 뿐이죠.
하지만 본디 책이라는 것은 작가가 만들고 독자가 완성시키는 것인 만큼, 한 명의 독자이자 팬으로서 나름대로 이 책과 니체 사이의 연결점을 이어가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설령 그 관계가 증명할 수 없는 空론이라도, 니체도 말했듯이 진실이 허구보다 가치있다는 것은 전제가 아니라 증명 대상이니까요.
II. ABGRUND
abgrund의 다른 작품인 '애체'의 리뷰에서도 썼습니다만, 이 서클은 에로 중심 서클인 주제에 말초신경적 자극 이외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묘한 능력을 갖고 있어요. ABGRUND는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작품이구요. 글로 써서는 그 미묘함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지만 일단은 대략의 줄거리를 소개합니다.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데려온 배다른 남동생이라는 스바루와 만나게 됩니다. 스바루는 여자애라고 해도 믿을 곱상한 외모에 여자 옷을 입고 다니도, 자폐증이 있는 것처럼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이상한 아이입니다.
그러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옷으로 자위(..)를 하고 있던 스바루를 발견하고, 이를 빌미로 그 자리에서 스바루를 범합니다(질투? 배신감? 단순한 육욕? 1인칭 시점의 해설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내면은 거의 표현되지 않습니다). 이후로도 스바루는 좋다 싫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채로 가학적인 관계가 이어집니다. 스바루는 유혹하는 것인지 절망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요염한 표정으로 주인공의 행위를 받아들일 뿐. 그러기를 3개월째, 주인공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친구 2명을 데려다 같이 스바루를 능욕합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여전히 좋다싫다 말이 없는 스바루에게, 이제는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주인공은 미안하다며, 자신은 집을 떠날 테니 이제 이런 관계를 그만두자고 말하고 돌아섭니다.
그 순간, 처음으로 듣게 되는 스바루의 목소리.
그리고, 이제까지와 다르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우리들은 그후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단 하나 변한 것이 있다면...'
이 위태위태한 섹스투성이 이야기를 유지하고 있는 끈은 무엇보다도 이제 외설이라기보단 예술의 경지에 들어선 극한의 에로티시즘의 작화일 테죠(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ㅠ'). 한편으론 이 아슬아슬한 이야기의 긴장감의 끈을 팽팽히 당기고 있는 것은 절제된 감정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하지 않는(못하는?) 스바루는 물론이고, 1인칭 시점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생각도 직접 드러내지 않아요. 첫 만남에서 스바루와 아버지에게 느낀 감정이 질투인지 배신감인지, 다 그만두자며 돌아선 뒷모습에 가려진 표정이 죄책감인지 허무감인지 패배감인지, 마지막의 '너는 정말 무서운 괴물이야... 충동적으로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니었는데' 라는 대사에 품은 가정이 경외인지, 절망인지, 혹은 찬사와 한탄인지.
이러한 절제된 묘사와 의도된 생략이 만들어내는 모호함이야말로 abgrund의 작품 전반에 녹아있는 '미묘함'의 워닌이고, 다른 서클과 abgrund를 차별화하는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눈앞의 에로시티즘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상술한 모호함에서 비롯된 긴장의 끈을 놓치 못한 독자는 마지막 장의 후기 첫머리에서 그 끈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쥐고 다시 책의 표지로 돌아가 그 부제, ABGRUND; Jenseits von Gut und Bose -선악의 저편- 에 주목하게 됩니다.
III. 선악의 저편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은 1885년 쓰여진 니체의 책입니다. 내용을 요약할 수도 있겠지만 수박 겉핥기만도 못한 무익한 일일 테니 넘어갑니다. 거두절미해서 이 글에서는 니체와 ABGRUND가 얽히는 지점을 선악의 저편 260절, 도덕적 가치 체계를 논하는 지점에 있다고 전제하겠습니다.
1. 도덕의 두 가지 유형
니체에 따르면 세상을 지배해 왔고 지배하고 있는 도덕률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유형이 있습니다 :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 도덕적 가치 차별은 스스로를 피지배 종족과 다르다는 것을 쾌감으로 인식하게 된 지배 계급 사이에서 생겨나거나, 아니면 여러 등급의 피지배자, 노예, 예속자들 사이에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가치, 즉 '좋음gut'을 결정하는 것이 지배자들일 때 가치들의 탁월함과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고양되고 자부심있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가치판단의 규준을 자신들의 상태에서 찾고, 스스로를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느낍니다. 고귀한 인간은 그와 같이 고양되고 자부심있는 상태를 '좋은' 것으로 삼고, 반대되는 상태의 인간들을 분리시켜 경멸하고 '나쁜schlecht' 것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도덕(주인의 도덕)에서 '좋음'과 '나쁨'의 대립은 '고귀한'과 '경멸할 만한'의 대립으로, '선gut'과 '악bose'의 대립의 유래와 다릅니다. 니체는 언어학적 계보 탐색을 통해 '좋음'에 분류되는 주인의 가치를 여러가지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좋은-고귀한-강력한-아름다운-행복한-신의 사랑을 받는' 정도로 정리하면 충분할 듯 합니다.
다른 유형의 도덕체계, 노예의 도덕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학대받은 자, 억압받은 자, 자유롭지 못한 자, 스스로에 확신이 없는 자, 지친 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도덕적 가치 평가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염세주의적 의혹이 표출되고, 인간과 그의 상황에 대한 유죄가 선고될 것이라고 니체는 주장합니다(원죄나 苦 같은 개념이 생각나네요). 노예의 시선은 강자의 덕에 증오를 품고 회의하며, 거기서 존중하는 모든 '선'을 날카롭게 불신합니다. 반대로 그들의 생존을 쉽게 하는 데 쓸모있는 특성들 - 동정, 호의, 인내, 근면, 겸손, 친절 등 - 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들의 생존을 어렵게 하는 힘, 위험, 공포, 정교함(날카로움), 강함 등에는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구요.
여기에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노예의 도덕에는 주인의 도덕에는 없는 '선'과 '악'의 대립을 발생시키는 발생지가 있습니다.
양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독수리와 독수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양을 생각해봅시다. 독수리가 양을 비웃을지언정 전혀 싫어하지 않고 맛있어하는 것을 탓할 수 없듯이, 양이 독수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며 사악하게 여기고, 독수리가 아닌 자 - 반대인 양 -을 선한 것으로 여기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양과 같은 노예의 도덕에서는 위험한 자가 '악인'이 됩니다. 반대로 '선인'은 위험하지 않은 자, 순수하고 날카롭지 않고 약간은 어리석은 자일 것입니다(전래동화의 주인공들은 늘 약간 어수룩하기 마련이죠). 주인의 도덕에서 고귀한 자, 가역한 자, 곧 위험을 가져오는 자가 '좋은' 인간이며 정직하지 못한 자, 비속한 자, 곧 경멸할 만한 자가 '나쁜' 인간이 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2. 선악의 저편으로
니체는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를 통해 길고 긴 싸움 끝에 노예의 도덕이 주인의 도덕에 대해 승리함으로싸 나약하고 평범하고 원한적인 '현대성'이라는 개념과 지금의 유럽이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가 그리스도교의 무리본능과 결합해 '선과 악'이라는 가치대립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고귀한=강력한'을 좋은 가치로, '비열한=무력한'을 나쁜 가치로 평가하던 고대의 귀족적 가치 등식이 유대인들과 그를 계승한 그리스도교의 원한 감정에 의해 비이기적이고 평범한 것을 '선'으로, 이기적인 것을 '악'으로 평가하는 가치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 주인도덕에 대한 노예노덕의 승리를 유럽 '도덕사의 노예 반란'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이어지는 현대성 비판에서 당시 유럽의 '문명', '인간화', '진보'라고 부르는 유럽의 민주화 운동의 도덕적/정치적 배후에 인간의 퇴화라는 생리학적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평준화와 평범화라는 무리동물적 인간이 형성되며 고귀하고 높은 인간 유형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죠.
니체에게 현대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자유정신의 인간을 육성하는 데 있습니다. 그에게 미래의 철학자는 곧 자유정신이며, 진정한 철학자는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입법자이자 자기 명령을 하는 자입니다. "오늘날 유럽에서의 도덕은 무리동물의 도덕이다"는 준엄한 단언 아래, 자신의 가치가 무리 속에 매몰되고 평준화되어 자기 소외 속에서 살아가는 병든 시대적 본능에서 인간의 진정한 과제는 바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것이 니체의 말이에요. 선악의 저편에 서서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며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 넘치며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에 새롭게 눈뜨는 개안의 훈련, 니체는 이를 미래의 '귀족적 인간gentilhomme'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치를 전환하여 '선악의 저편'으로 나아갈 수 있는 누군가 또는 세계관을 준비하는 것이 니체의 '선악의 저편' 저술 의도라도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IV. 노예와 주인
ABGRUND의 주인공은 의심할 바 없이 노예의 도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의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번째는 스바루를 범하는 이유가 아버지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는 것. 질투는 일종의 원한이고, 원한은 노예의 도덕의 핵심적인 속성입니다. 주인이 나쁜 자에 품는 '경멸'은 주인공이 스바루에 대해 표출하는 분노나 질투와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정 반대의 감정입니다. 니체는 주인과 가장 거리가 먼 두 가지 감정으로 '허영심'과 '원한'을 꼽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고 타인의 평가에 좌지우지하는 마음인 허영심이 스스로가 가치를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주인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원한 역시 자신과 대비되는 것을 비천한 것으로 보는 주인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비되는 것을 위험한 것, 악으로 삼고 싶어하는 노예가 품는 감정입니다.
두번째는 주인공은 스스로에게서 긍정적인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인은 먼저 자기 스스로에게서 '좋음'을 느끼고 그 반대를 나쁨으로 칭하지만, 노예는 먼저 자기 밖을 둘러보며 '악'을 찾아낸 다음 거기에 반대되는 스스로를 선으로 규정합니다. 주인공이 배출하는 원한과 한탄은 항상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아버지, 친구, 스바루를 원천으로 하고 있어요.
세번째는 양심의 가책과 허무함을 느끼고 스바루의 학대를 그만두는 점. 니체는 양심을 선의지 같은 것이 아니라 '밖으로 배출될 수 없을 때 안으로 방향을 돌리는 잔인성의 본능'으로 보는데, 주인공의 후회 가학욕의 자학적 역류라는 점에서 노예의 도덕을 따릅니다. 스바루에 대한 일방적이고 가학적인 욕망이 망가져 있듯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는 후회 역시 망가져 있어요. 노예가 주인에게 복수하지 못하는 무력감을 자발적 용서라는 미덕으로 위장하듯이, abgrund의 주인공은 스바루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절망을 양심의 가책이란 이름으로 포장합니다.
요컨대 주인공은 질투와 원한으로 스바루를 원했었고, 이를 포기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덜려고 합니다만, 그의 스바루에 대한 욕망도 포기도 모두 노예에게 어울리는 원한적 뿌리의 사회적 선악을 기준으로 한 행동이라는 것이에요.
스바루도 평범한 에로 동인지의 여주인공(..)처럼 일반적인 상식을 갖고 있었으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자신을 학대하는 주인공을 당연하게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반항하다가, 에로물 특유의 육체적 스톡홀롬 증후군('ㅠ') 끝에 굴복하거나 저항을 포기하는, 용서와 순응이라는 이름으로 약자의 무력함을 포장하는(혹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것도 없이 순수하게 본능적인 욕구에만 충실한) 전형적인 노예의 이야기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ABGRUND의 스바루는 달라요. 그것이 이 얇은 책을 두껍게 읽을 수 있는 원천이고, abgrund의 동인지들 내내 묻어있는 미묘한 감정선의 파편이자, 스바루를 '괴물'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스바루와 (노예의 도덕을 따르는) 일반적인 히로인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스바루는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들에게 원한이나 원망을 품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작가는 퇴폐적인 표정과 절제된 감정묘사로 만들어낸 모호함으로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절정 부분에서야 이를 발깋는 전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바루의 태도 변화는 주인공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빠.. 하자"로 함축되는 스바루의 행동은, 무력함을 선으로 치환하여 악인 상대방을 교화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비참하고 비열하고 혼란스럽고 무력한 상태의 주인공을 자신이 좋아하는 상태로, 자신에게 어울릴 만한 상태로 바꾸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스바루에게는 개인적 호오가 있을 뿐 사회적 선악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술가가 자족감에 빠져 독자의 의향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인류사에 남을 걸작을 그려내듯이, 스바루의 인식 체계에는 그 무엇보다도 앞서서 자기 자신이, 니체식으로 말하면 단순한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몸의 정동, 충동, 무의식이 함꼐 작동하는 자아가 선행합니다.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에서 가치규준을 찾는 것은 주인의 도덕의 첫 출발점이자, 니체가 말하는 현대의 인간 왜소화 경향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되는 지점이에요
그렇게 스바루는 노예의 상태에 있던 주인공을 자신의 천상으로, 자신의 늪으로, 선악의 저편으로 안내합니다. 그 늪이자 천상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양이 독수리를 두려워하듯이 '너는 정말로 무서운 괴물이야... 충동적으로, 건드려 보는 게 아니었어' 라고 중얼거릴 수 밖에 없는 주인공. 그가 들여다보고 있던 심연-스바루-이 어느새 자신 속에 들어와 있던 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이 이야기는 HAPPY END라는 담담한 단어로 끝을 맺습니다.
V. 심연 속에서
저는 니체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전집 중 두세 권을 읽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제 오독이 니체의 논리 전개를 망치지 않도록 원서와 해설에 있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쓰는 방식으로 3장을 구성하려 했습니다만 결국 제 해석이나 감상이 몇 줄 더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니체의 사상과 이 글에 상층되는 점이 있다면 아마 저의 실수일 것입니다.
ABGRUND를 처음 읽었을 때는 마지막 문구와 후기의 인용문을 보고 '이 문구를 쓰려고 선악의 저편이라는 부제를 붙였구나' 하고 가볍게 책을 덮었었어요. 그때는 이 서클에 대해 특별한 기대도 없었고, 니체의 선악의 저편도 읽지 않았었죠.
이 작가가 그동안 낸 '미묘한 감정을 자극하는' 동인지들을 거진 다 읽어본 지금은, abgrund가 '무언가'의 저편으로 넘어가려고 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32페이지의 이런 말 그대로의 '얇은' 책에서 누군가가 읽어낼 또는 재구성해 낼 수 있는 메세지를 담을 수 있다면 그 작가는 그분 나름대로 무언가의 저편으로 넘어갔다고, 니체의 말대로 초극했다고 불러드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