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책 두껍게 읽기 : abgrund, 애체靉靆
2017. 3. 21. 01:04ㆍ:: Review /동인지
2015년 5월 28일 작성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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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 두껍게 읽기 : abgrund, 애체靉靆 '애체靉靆하다'와 '처연하다' 애체(靉靆)는 코미스파6(2015년 3월)에서 발간된 서클 abgrund의 동인지입니다. 동인지라고 야한 종류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은 흔히 알려진 동인지의 의미대로의 성인물이에요. 총 36페이지의 얇은 분량중 16페이지가 에로 묘사로 되어 있습니다. 한달 후에 나온 속편은 총 28페이지 중 16페이지가 에로 분량이구요. 국어사전에 따르면 '애체靉靆(구름낄 애, 구름낄 체)하다'는 '안개나 구름 따위가 짙게 끼어서 자욱하다'로 되어 있습니다. 일본어사전에서도 뜻은 별다르지 않은 모양이구요. abgrund의 동인지 '애체'는 구름이나 안개가 자욱한 모양을 뜻함과 동시에 '만나고 싶다'는 뜻의 아이타이あいたい와 소리가 같음을 의도한 제목이 아닌가 합니다. 한편으로 하나 더, 이 얇은 책을 읽다 보면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체'라는 제목에서 한국어 '처연하다'라는 단어를 연상되지 않을 수가 없었네요. 처연함에 대하여 고전 시학인 롱기누스(롱기누스의 창과 관련 없습니다;)의 '숭고에 대하여'가 숭고의 원천을 독특하게도 '큼'에서 찾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입니다만, 저는 처연함의 원천을 '비움(空)'에서 찾고 싶네요. 처연함은 슬픔에서 파생되는 하강의 심상인만큼 욕구의 불충족이라는 상태에서 기반함은 당연합니다. 동시에 처연함이 슬픔과 차별화되는 점은 불충족이라는 상태 자체가 아니라 불충족이라는 상태를 받아들이는 주체의 태도에서 발현된다는 점입니다. 처연함은 불충족의 상태와 충족의 상태 사이의 괴리에서 당연하게 발생하는 감정(슬픔)이 아니라, 불충족의 상태에서 충족된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슬픔의 주체가 스스로 포기할 때 발생하는 세부적인 감정이라는 것이죠. 요컨대 처연함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슬픔을 경험하는 주체가 의식적인 행위로서 스스로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할 때에 비로소 생겨나는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처연함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집착이 아니라 놓아줌을 원천으로 하는 심상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동시에 처연함은 완전한 비움, 깨끗한 포기가 아니라 여운이 남는 비움이라는 것도 첨언하고 싶네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실은 절대로 고이 보내드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얀데레?) 받아들이는 해석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저는 앞서 설명한 처연함의 '놓아버림', '비움'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멋스럽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으면서도 옷자락을 붙잡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그이의 발자국에 닿을 진달래꽃을 한장한장 뿌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깨끗하지 못한 비움, 상술한 처연함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애체에 대하여 애체의 줄거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스스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구원받는 이야기'로 줄일 수 있겠네요. '나는 행복해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정서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 처연함의 근원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면 이 30p 남짓한 에로 동인지는 그 정서를 어떻게 살려내고 있을까요. 첫번째는 작화. 제가 주인공 세츠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표지랑 본문 작화랑 인상이 너무 다른데?' 였습니다. 컬러 표지에서는 흑발적안이지만 본문에서는 머리에 톤을 칠하지 않아서 은발이나 금발로 보일 것 같은 인상이에요.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색을 칠하지 않고 비워 놓았다'에서의 비움과 '마음을 비워 놓았다'의 비움은 서로 다른 의미이지만 두 비움은 애체와 처연의 발음과도 같이 묘하게 맞닿고 있습니다. 세츠의 머리색을 칠하지 않은 것과 세츠의 마음속을 비워 놓은 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우연치고는 너무나 정교한, 우연이라면 봄에 싹이 트는 것만큼이나 아름다운 우연이라고 할까요. 두번째는 플롯. 스스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세츠입니다만, 사실 제3자의 입장에서도 세츠의 처신은 일견 배은망덕해 보일 만합니다. 중년 남자의 딸뻘인 나이로 첩으로 들어와 가정을 망가뜨리고, 남편(?)이 죽은 후로는 그 아들과 관계를 맺는 모습은 알고 보나 모르고 보나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 구도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츠에게 탓을 돌릴 수 없는 것이 이성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세츠는 자신의 책임과는 무관한 가정의 비극에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되뇔 뿐이었고, 그런 마음으로 죽은 코우지의 아버지에게 향했을 어머니의 눈먼 칼도 그것이 자신의 죗값인 양 저항하지 않고 맞은 듯합니다. 요컨대 세츠는 자신도 말려들어 희생자가 된 비극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돌리고 자학하는 인물입니다. '스스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함'이 처연함이라는 심상과 직결되는 정서라고 쓰긴 했지만, 세츠가 정말로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악한이었다면 그 비움은 유치한 뻔뻔함이 되었을 뿐 결코 처연함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에요. 반대로 세츠가 불쌍하기만 한 주인공이었다면 다른 것에 앞서 식상함이 이야기 전체를 덮어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애체에서의 세츠와 코우지의 관계는 그런 유치함과 식상함의 함정을 신중하게 피하며 처연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요. 애인의 아들, 아버지의 애인이라는 배덕적인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그런 식상함을 탈피하는 애체의 플롯은 단순히 말초신경 자극을 위한 배덕적 관계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공들인 구성이에요. 세번째는 이 작품이 에로 동인지, 다시말해 외설물이라는 점 자체입니다. 에로동인지 주제에 처연함은 고사하고 말초신경적 자극을 제외한 그 어떤 정서라도 고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던가? 하고 어이없어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이 책이 외설물이기에 더욱 처연함이라는 정서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네요. abgrund가 전부터 말초신경적 자극 이외의 묘한 감정을 자극하는 작품들을 그려오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에로 중시 서클이라, 이렇게까지 본연의 목적(에로)을 압도할 정도의 정서를 그려낸 것은 누구에게나 예상외였을 거에요. 처연함의 속성이 더욱 부각되는 것은 그런 탓도 있습니다. 평범한 보통의 진지한 동인지였다면 그냥 아름다운 이야기구나, 하고 말았을 이야기가 에로동인지 주제에 이런 묘사가 가능해? 하고 놀라게 된달까요. 한편으로는 이 작품이 배덕적이고 외설적인 소재를 사용했기에 처연함이 더 부각되는 면도 있습니다. 처연함의 근본 속성이 비움, 자신을 버린다는 것임을 상기해 봅시다. 자포자기에서 '자포'란 스스로를 해친다는 뜻이고, '자기'란 스스로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뻘 되는 중년 남자의 첩으로서 살아온 여성이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곧인즉 몸을 버린다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진지한 장르에서였다면 무리해 보였을 전개가 원래 그런 물건(외설물)이기에 무리없이 읽히고,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버렸'다면 처연하기보다는 착잡했을 가증성이 큰 전개가 처연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외설과 예술 사이의 골짜기에서 외설과 예술의 차이를 보는 이에게 유발하는 정서적 효과로 분류하면 '난잡한 성욕을 자극하는가' 아니면 '보편적인 감성을 자극하는가'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듯합니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하자면 '인간의 일차적 욕구를 목적으로 하는가' 또는 '진리, 선,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하는가'로 바꿀 수도 있겠네요. 한 명의 사람이 본능적인 욕구에 충실한 짐승인 동시에 불멸의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일 수 있는 것만큼이나, 하나의 이야기를 외설인 동시에 예술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 798534 67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