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은 걸작으로 태어나는가: 울려라 유포니엄

2017. 8. 27. 19:33:: Review /기타

2015년 7월 4일 작성했던 글. 다음달 신神의 귀환을 앞두고 전혀 다른 장르(애니)긴 하지만 버금가는 작품 하나를 되돌아보았다. 이것만으로도 신성모독을 느끼기에 여기까지만.


걸작은 걸작으로 태어나는가 : 울려라! 유포니엄

1. 서 :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2. 세계와 주인공

        1학년들

        3학년들

        아오이
        
        코사카 레이나

        취주악부


3. 현실성의 의의

        타마코마켓
        
        케이온


4. 걸작은 걸작으로 태어나는가







1. 서 :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1화에서 이 대사를 보고 처음 생각했던 점은 '꽤 노골적으로 가는구나'였습니다. 엔딩에서 대놓고 청춘이나 고양감이라는 단어를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애니 좀 봤다하는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전개를 물흐르듯 예상할 수 있을만한 대사라고 할까요. 새로 들어온 루키 1학년들이 3류 취주악부를 정상으로 끌어올리는 가운데 일어나는 그런 이야기라고. 부원수가 많다는 복병만 빼면 평범한 이야기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었어요. 

물론 그 예상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쿄애니는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특이한 시도들을 끊임없이 해오던 제작사지만, 울려라! 유포니엄은 그런 쿄애니의 생산물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작품이에요..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자면, 유포니엄은 애니메이션이나 라이트노벨, 판타지소설, 미스터리 등이 공유하는 '장르문학'이라는 틀의 전제를 벗어던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실존주의 이후의 현대문학이 공유하고 있는 주제는 '인간의 모순과 실패는 누군가나 무언가의 탓이 아니라 그것이 세계의 원래 모습'임을 깨닫고 마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는 허무주의나 비관주의의 부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긍정적인 함의도 부정적인 함의도 없는 명제입니다. 합리적인 정신(理性)과 의지를 통해서 인류와 세계를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여갈 수 있다는 과거의 믿음에 대한 반성인 것이죠. 한마디로 말해서 현대문학 속의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며, 세계는 의지나 조리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인 방법으로 흘러갑니다. 

반면 장르문학의 주인공은 항상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주인공이 됩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뜻대로 세계를 변화시킬 의지나 능력을 가지고 있고, 세계는 주인공의 선택에 의해 요동칩니다. 이 경우 세계의 물리적인 규모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교실 하나이던 우주나 국가이던, 그 세계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요컨데 장르문학 속의 '세계'는 주인공이 끝내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에 관계없이 세계 자체가 주인공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정순한 세계입니다.



장르문학에서 세계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은 주인공이 잘나거나 못난 탓이 아니라 그것이 (순수문학과 비교되는)장르문학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초인인가 범속한가는 관계없어요. 와타모테의 토모코와 에바의 신지는 두고보기 힘든 안쓰러운 사람들이지만 그들과 그들 주변의 몇몇 인물들 이외는 다 배경설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이 세계는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사람의 아들의 민요섭과 조동팔은 만화책으로 고친다면 동인지 십수권은 나왔을 매력적이고 능력있는 인물이지만 그들의 노력은 소설 속에서조차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납니다. 이 차이는 서술기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각각 장르문학과 세계문학이 전제하는 세계관과 인간관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구분하는 분명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작품 내적인 면에서 그 경계를 찾자면 이쪽이 꽤 정확한 기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소설 속의 세계를 통제하고 있는가."


2. 세계와 주인공



애니메이션의 완성도를 구성하는 세부기준들을 꼽으라면 작화, 연출, 캐릭터, 스토리, 플롯, 연기 등등이 있겠습니다. 유포니엄은 물론 그런 요소들도 최상위급에 속하는 훌륭한 작품이지만, 그것과 별도로 개인적으로 감탄했던 포인트는 '자신들의 세계를 통제하지 못하는 주인공들'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대단하고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감히 말하건데, 1998년 이후로 이러한 시도를 해서 성공했던 애니메이션은 제가 아는 한 없었습니다.

유포니엄이 전통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애니였다면 아마 이런 내용으로 전개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력없고 의욕없는 취주악부에 음악에 대한 열정과 실력이 있는 1학년이 입부하면서 부의 분위기를 바꿔간다는 것을 큰 줄거리로, 선배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에 대한 협력과 반대, 그 와중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사고와 끝내 여러 갈등들을 해소하고 화합하여 전국대회에 나가는 이야기. 그 와중에 전국대회에 나가고 싶어하는 이유나 실은 모종의 이유로 실력을 숨기고 있던 누군가 따위가 복선으로 양념이 되었겠죠. 이는 후배와 선배와 부활동을 소재로 하는 장르문학이라면 모두가 답습하는 이야기의 전형적인 기본 틀이기도 합니다.

유포니엄의 스토리는 일견 위의 기본틀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전혀 다릅니다.


1학년들



전형적인 부활동을 소재로 하는 장르문학에서 새로운 부원(1학년)들의 유입 자체가 변화를 불러오고 갈등을 유발하는 이야기의 시작이 됩니다. 하지만 유포니엄의 서술자인 쿠미코를 위시한 주인공들의 입부는 그냥 1학년들의 입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그로 인해 부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거나 하는 일도 없습니다. 타키 선생님에 의해 부 내에 첫 갈등이 일어날 때에도 주인공들은 어느 쪽에도 손을 들지 못한 채 흘러갈 뿐이고, 엉망인 연주나 연습의 취소에 실망하기는 해도 그 상황을 변화시킬 만한 영향력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후의 울보 트럼펫, 오디션 등의 사건에 있어서도 주인공이 압도적인 능력과 리더쉽을 발휘해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황에 휩쓸리는 가운데 쿠미코의 복잡다단한 심경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쿠미코의 생각이 부활동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고, 파리 회의건 오디션이건 쿠미코의 낙관적인 예상과는 무관하게 결정되지요. 

사실 당연한 일이에요. 입학 인사에서 '나는 여러분을 짓밟고 정상의 자리에 올라갈 것'이라고 공언하는 편입생이나 면전에서 대놓고'선배들 정말 못하시네요' 라고 말하는 신입생 따위는 말 그대로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사람이겠죠. 아니 애당초 보통 인간은 그렇게 확고한 목적의식을 품고 무언가에 도전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보통 고교생이 취주악부에 입부하는 이유야 예전부터 악기를 했으니까, 음악이 좋아서,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은데 새로 사귄 친구가 취주악부라서 정도가 현실적인 이유겠죠. 요컨대 유포니엄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통제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주인공,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아닌 진짜 인간입니다.


3학년들



다른 주인공인 3학년 3인방 - 하루카, 카오리, 아스카 - 도 3학년에 각각 부활동에 책임과 영향력을 지고 있는 간부이고 파트 리더이지만 취주악부라는 손바닥만한 세계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쿠미코의 존재여부가 파리 회의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듯 파트 리더들의 의견 역시 누구의 것 하나 온전하게 투사되지 못합니다. 하루카가 무능하고 카오리가 너무 착하고 아스카 심성이 뒤틀린 친구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아니라 누가 되었다 하더라도 원래 세계라는 것은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에요. 카뮈식으로 표현하면 '인간의 정순함에 대한 열망과 세계의 부조리 사이의 간극'이라는 실존주의 이후의 현대문학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주제를, 유포니엄은 부활동이라는 압축된 세계를 배경으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아오이



상술한 유포니엄에서의 세계와 주인공의 관계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캐릭터는 아오이일 것입니다. 보통의 장르문학에서 이렇게까지 극적이지 않은 이유로 그들의 세계에서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발을 빼는 인물이 있던가요. 불가피한 이유로 퇴장하는 인물도 마지막 순간에는 최후의 빛을 내뿜게 해 주거나 다른 누군가를 빛나게 해 주는 것이 장르문학의 불문율입니다. 아오이가 부활동을 그만두는 이유는 참으로 시시하고도 재미없고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심지어 '나는 부활동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어'같은 대사까지 치는 것은 부활동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에서는 보통 용서받을 수 없을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아오이의 행보에 '재미없음'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씁쓸함과 싱숭생숭함을 느끼게 됨은 개인의 의지나 사정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세계에서 발을 빼는 모습이 독자들에게 연민과 두려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겠죠.


코사카 레이나



그러한 세계와 주인공의 관계에서, 코사카 레이나는 유별나게 튀어 보이는 인물입니다.

그 누구의 의지에도 반응하고 있지 앟는 유포니엄의 세계입니다만, 코사카 레이나만은 그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아스카도 좀 다르긴 한데 얘는 애니 분량에선 떡밥이 다 풀리지 않은 것 같아 넘어갑니다). 코사카 레이나가 목적으로 삼고 있는 '특별해지는 것'의 의미는 레이나 자신도 스스로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있어서 불명확해 보입니다만, 상술한 유포니엄의 주제를 전거로 삼으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세계에 휩쓸려가지 않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세계를 자신을 중심으로 돌게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 흐름에 생각없이 바보처럼 휩쓸려가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의지. 레이나의 언동은 사춘기나 비슷한 시기의 좌충우돌, 좀 중2병도 생각나게 하는 알쏭달쏭한 것들이지만, 표현과 진지함은 달라도 비슷한 생각을 품어 보았던 독자들이라면 쿠미코와 마찬가지로 레이나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을까요. 3화의 신세계에서와 8화 산길에서의 쿠미코와 레이나의 회화는 그 자체로도 완벽하게 아름답지만, 그런 말로 이야기하면 재미없을 이야기를 그야말로 음악으로 웅변하는 위대한 장면이었어요.


취주악부



개별 인물들로부터 세계로 눈을 돌려 볼까요. 유포니엄이 전제하는 세계와 주인공 사이의 관계를 염두에 두면, 50명이 넘는 부원을 갖고 있는 취주악부를 세계로 택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묘사되는 인물은 10여명 정도라고 해도 그 정도 인원수를 포함하는 세계인 한 특정인을 중심으로 세계가 흐르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워집니다. 더불어 3화의 하즈키의 대사처럼 취주악은 개인 경기가 아닙니다. 독보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연주자는 합주 전체의 화음에서는 오히려 불협화음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유포니엄이 목적했던 바가 주인공들에게 통제되지 않는 채 흘러가는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라는 전거 하에서 취주악부는 실로 적절한 무대였던 셈이죠.

더불어 훌륭한 인간은 그 훌륭함으로 세계를 선도하기보다 그 훌륭함으로 인하여 세계와 충돌하게 됩니다. 실존주의 이후의 세계관은 그 이유를 세상이 썩어서, 주변인들이 범속하고 자기보다 잘난 인간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에 기쁨을 느껴서가 아니라, 좀 웃기게 들립니다만, '원래 그래서' 라고 설명합니다. 이 세계의 근원적인 부조리, 라는 실존주의 이후 현대문학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염세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비가 내리는 것을 하늘의 은혜가 아니라 그냥 기상현상이라고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냉정하고 가치중립적인 기준입니다. 그런 의미의 세계관을 살리기 위해서도 취주악부라는 누구의 의지도 있는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 세계를 무대로 삼은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3. 현실성의 의의



유포니엄의 세계와 주인공들이 다른 어떤 진지한 작품의 주인공들과 비교해서 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괴이한 입버릇, 도드라진 성격, 총천연색 머리칼을 가진 등장인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자신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계에서 살고 있지 않는 '진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소설같은 이야기, 소설속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하지만 (적어도 실존주의 이후의) 순수문학의 주인공을 '소설속의 주인공'으로 삼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작품성의 감점사유에요. 

반면에 장르문학은 그러한 평가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장르문학에서 캐릭터라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어디까지 빨아들일 수 있는지만 보아도 이는 순수문학과 대비되는 장르문학의 막강한 장점이에요. 다만 캐릭터의 위력에 경도된 나머지 '진짜 인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언제부턴가 잊어버리고 만 것이 장르문학의 현실이기도 하구요.


타마코마켓



언젠가 다른 글에 댓글을 달면서 '쿄애니가 타마코마켓에서 시도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다' 고 쓴 적이 있는데, 그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보통의 애니에서 10대 주인공들은 부모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굴거나, 부모가 해외 전근중이라는 등의 편리한 핑계를 만들거나, 아예 누나라고 해도 믿을 모에 캐릭터로 탈바꿈시키거나 해서 부모라는 존재를 희석시킵니다. 애니 속의 미중년 미소녀 부모가 아니라 진짜 부모라면 대개 애니메이션의 10대 주인공들이 하는 일에 어깃장을 놓는 것이 정상일 테니까요. 그런데 타마코의 아버지 마메다이씨는 진짜 아버지죠. 타마코마켓과 유포니엄을 한 직선위에 놓고 해석하면 마메다이씨는 '진짜 인간'을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포섭하려 한 첫번째 시도였다고 평할 수 있지 않을까요.


케이온


그런 의미에서 케이온은 유포니엄과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지금도 가끔 유포니엄 1화를 돌려보면 엥 우이가 왜 나오지? 하고 깜짝깜짝 놀랄만큼 포니테일 쿠미코랑 우이가 닮긴 했습니다만(笑), 케이온만큼 온 세계가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도 드물어요. 전 지구에 주인공 5명과 주변인물 몇 명만 존재해도 경음부의 일상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듯, 아니 원래부터 음악실 이외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주인공들의 존재가 세계 전체를 완전하게 채우고 있는 것이 케이온이고, 케이온을 위시한 소위 일상물 작품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유포니엄은 그런 작품들과 '현실성'이라는 단어를 다른 뜻으로 사용합니다. 케이온류의 애니에서 현실성을 높인다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 극중의 사건이 실제로 극중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애니 속의 세계가 현실세계와는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암묵적인 전제로 삼은 이후의 현실성이에요. 
반면 유포니엄의 현실성은 애니 속의 세계는 현실세계와 별도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일부이고 애니 속 세상의 법칙은 현실의 법칙과 같은 방법으로 흘러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현실성은 작화나 심리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물론 유포니엄은 그 두 요소도 합격선 이상입니다만) 앞서 이야기한 근본적인 세계관의 전제에서 달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죠. 

쿄애니의 울려라! 유포니엄은 원작이야 어떻게 분류되건 장르문학의 대표적인 갈래인 애니메이션입니다. 그러면서도 유포니엄은, 진짜 인간들을 데리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꾸려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진짜 인간이야말로 그 어떤 형형색색의 인물들보다도 독창적인 캐릭터고 진짜 인간들의 이야기야말로 그 어떤 독특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보다도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잊혀진 진리를 발굴해내고 있습니다. 유포니엄이 그간의 쿄애니의 어떤 작품보다도 독창적이고 작품성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런 의미에요.

유포니엄을 보면서 다른 애니에서 겪어보지 못한 묘한 현실성과 독창성을 느꼈다면, 장르문학이 당연하게 전제해 온 관념 중 하나를 과감하게 벗어던진 쿄애니의 시도를 제대로 읽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포니엄이 수많은 좋은 애니들 중 하나가 아니라 위대한 작품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치밀하고 섬세한 작화나 심리묘사 이전에 바로 그 시도를 높이 샀기 때문일 것입니다.



4. 걸작은 걸작으로 태어나는가

하나의 작품이 수많은 좋은 작품들을 넘어선 위대한 작품, 다시 말해 '걸작'으로 분류되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기본적인 요소들 - 애니메이션으로 치면  작화, 연출, 캐릭터, 스토리, 플롯, 연기 등이 모든 면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난 경우.
하나는 그 작품 이전과 이후를 구분할 정도로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된 작품. 
하나는 이전 작품들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독창적인 시도를 행하고 성공한 작품으로, 그 독창성 자체가 의미있는 작품. 

그러한 걸작의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들을 꼽으라면, 개인적으로 첫번째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으로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와 카우보이 비밥, 두번째 기준에는 기동전사 건담과 신세기 에반게리온, 케이온.

그리고 세번째 기준에 부합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울려라! 유포니엄을 뽑고 싶네요.



저는 굳이 따지자면 '걸작은 독자의 반응과 무관하게 걸작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기보다는 '같은 작품이 누군가에겐 걸작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졸작일 수 있으며, 걸작이 걸작인 이유는 많은 사람이 걸작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축에 속하긴 합니다만,
가끔 그런 생각과 무관하게 걸작은 걸작으로, 영웅은 영웅으로 태어나는구나 하고 경외감을 담아 전율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포니엄의 훌륭한 점들 - 뛰어난 작화, 개성있는 캐릭터, 좌절감과 성취감 사이에서의 고양감, 마음 속을 도려내는 듯한 심리묘사와 깊이있는 인간관 등은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좋은 작품을 넘어선 위대한 작품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신의 수염이 휘날리고 있는 방향에서 신과 종교의 본질을 깨닫고 전율하는 것은 분명 이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가 할 수는 없을 경험이지만, 그것이 이 그림을 걸작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유포니엄은 그런 종류의 작품이라고, 아무 과장도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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