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연속적인가 단절적인가: 만화와 動畵(애니메이션)의 차이

2017. 3. 8. 23:33:: Review /기타

2014년 8월 1일 작성했던 글.



서론: 베르그송과 바슐라르


베르그송(1859~1941)과 바슐라르(1884~1962)는 둘 다 손댄 분야가 좁지 않은 철학자입니다만, 둘을 붙여서 이야기하면 역시 '순수지속'과 '인식론적 단절'로 대표되는, 연속과 비연속의 시간 논쟁이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베르그송



재미없는 이야기이니까 후딱 하고 지나가자면, 플라톤-데카르트-칸트로 이어지는 합리주의적 인식론의 철학사조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베르그송입니다. 
베르그송이 보기에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사물들을 불연속적으로 단절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체적인 틀에 맞추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시광선에 존재하는 무수한 색을 빨주노초파남보로 명명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실제 무지개는 색 사이에 구분이 없듯이, 실재 자체는 흐르는 것이고 이미지의 명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학이나 논리학의 추상적인 세계는 유동적인 실존하는 세계를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베르그송 인식론의 핵심 주장이고, 그가 유체의 철학자, 연속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을 시간의 흐름에 비유하여 전개하면서 발전시킨 '순수지속'이라는 개념은 지금도 철학에서 중요한 명제 중 하나입니다.



바슐라르



바슐라르는 이 순수지속이라는 개념에 다시 반기를 들고 나왔는데요. '순간의 직관(국내에는 순간의 미학으로 출간)'이라는 책에서 루프넬의 소설을 매개로 하여 시간은 연속적이라는 베르그송의 시간론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논증 과정은 참으로 지난하니 생략하겠지만, 바슐라르에 따르면 베르그송의 생각과는 달리 실재 자체도 이미지나 감각이 아니라 수학적으로 구축된 세계라는 겁니다. 무지개는 색의 이미지가 아니라 빛의 파동방정식이고, n차원이나 양자역학이니 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나 이미지로는 이해 불가능하고 수학적 이성, 순수한 이성으로만 파악가능한 무언가, 그것이 실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바슐라르가 되게 재미없는 사람 같지만 오히려 그런 식으로 과학과 철학과 시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않기에, 시인 철학자라고도 불릴 정도로 유려한 문체로 유명합니다 :) )


아무튼 바슐라르 자신이 쓴 표현을 빌리면, 베르그송의 철학은 "지속의 철학"이고, 바슐라르의 철학은 "순간의 철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르그송에 따르면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 이고,
바슐라르에 따르면 "시간은 단절된 순간순간의 비연속적인 집합" 입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차이

여기까지 써 놓으면 굉장히 재미없고 영양가도 없는 철학사 수박 겉핥는 글인데.. 이 두 철학자의 시간 인식을 굉장히 재미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만화를 본 것이, 이 글을 덕게에 쓰는 이유입니다 :)

김세영씨 도박만화 갬블 오딧세이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를 24시간, 1440분으로 한다는 약속에 동의하고 있으며,
24시간 동안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24시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속도는 그것을 측정하는 사람의 좌표와 운동 속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집니다. 뛰는 사람의 시계까 걷는 사람의 시계보다 느리게 간다는 것, 1층에 사는 사람이 2층에 사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사다는 것.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아인슈타인 이론입니다.
우리가 심리적으로 느끼는 시간은 어떨까요?  시간의 감옥에서 가장 빠르게 흐른다고 로렌스는 말했습니다. 조이스의 소설에 묘사된 하루는 보통사람의 1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집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흐르는 시간과 소설이나 만화에서 흐르는 시간 역시 다릅니다. 데스노트의 주인공 야가미 라이토는 10초 동안 엄청난 양의 독백을 할 수 있지만, 대장금의 주인공 이영애는 10초동안 한두마디 대사밖에 할 수 없습니다.

베르그송의 핵심적 시간개념은 '순수지속'입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시간은 본질적으로 비연속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베르그송의 시간개념을 부정했습니다.

베르그송의 견해를 따르면 시간은 영화와 같은 것이 되고, 바슐라르의 견해를 따르면 시간은 만화와 같은 것이 됩니다.
영화는 흘러가지만 만화는 흘러가지 않습니다. 영화가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이라면 만화는 단절된 시간들의 집합체입니다.


영화는 정해진 시간 안에 감상해야 하지만 만화는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변화에 있어서의 시간의 흐름을 조작하는 건 독자 자신.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베르그송의 시간개념을 따른다면 우리는 영원히 시간의 노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슐라르의 시간개념을 따른다면 우리는 시간의 지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종종 명작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들이 좀 미묘한 퀼리티로 마무리지어지는 것도 그러한 차이, 단절된 시간과 연속적인 시간의 간극을 잘 메우지 못했기 때문인 이유가 있는 듯 합니다. 대사량이 많은 만화들이나(데스노트는 제가 애니쪽을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드래곤볼이나 원피스처럼 만화의 호흡에 애니메이션의 호흡을 맞춰나가야 하는 경우는 그러한 문제점이 심화되는 것이죠. 만화는 매주 똑같이 17페이지를 연재해도 등장인물과 이야기의 밀도와 속도에 따라 5분만에 읽는 장면도 10분만에 읽는 장면도 있는 반면, 애니메이션은 어쨌건 매번 20분간 필름이 돌아야 하고 보는 사람도 20분을 투자해야 하니까요.



최근 본 애니메이션 중에 만화와 애니메이션간의 간극을 가장 크게 느꼈던 작품은 이나리 콩콩 사랑의 첫걸음이었습니다. 우카 님이 움직인다는 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는 애니메이션이지만, 원작 만화가 갖고 있는 숨은 장점들은 대부분 살리지 못했다는 것이 제 감상입니다. 이나리 만화판의 강점은 모에요소가 아니라 소녀만화 치고는 굉장히 진지하고 상세한 상황묘사와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이야기의 구성,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담담하고 단단한 전개속도인데, 애니메이션에서는 한정된 화수 안에 필요한 전개까지의 이야기를 우겨넣다 보니 진지한 상황묘사는 사라지고 주마간산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런 이야기가 되어버렸더라구요.





예전에 '역사를 창조한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면서(링크) 아즈망가 대왕이 '動畵인 애니메이션으로도 일상물이라는 장르가 성립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4컷 만화라는 극히 짧은 호흡, 일정한 중심 스토리가 없는 방향잡기가 힘든 일상물이라는 애니메이션화하기 어려운 조건을 훌륭하게 극복해냄으로써 이런 장르에서도 만화와 애니메이션 간의 간극을 메울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라는 것이죠. 




시간이 수직으로 용솟음치는 순간



한편 바슐라르는 일상적인 정지된 시간, 강물이나 지나가는 바람처럼 수평적으로 사라져버리는 일반적인 시간과 구별되는 '수직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수직적' 흐름은 정열과 이성이 양면감정병존적으로 결합하는 순간, 바슐라르에 따르면 '시적 순간'에 등장합니다. 이 시적 순간이라는 것은 예술가나 짧은순간 결정을 내리는 직업이 아니면 사실 보통 사람의 일상생활에서는 경험하기 힘들고 창작물이나 예술 속에서 경험하기 마련인데.. 애니메이션 중에서 그러한 순간을 꼽으라면, 전 제일 먼저 생각나는건 논논비요리 4화의 그 장면이네요 :)






50초 넘게 렌게 얼굴을 원샷으로 천천히 클로즈업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거 되게 지루하네, 제작비 아끼는구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한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면서도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그런 굉장히 특별한 50초였어요. 지금도 눈을 몇번이나 깜빡이는지, 눈물이 몇방울이나 떨어지는지 세면서 보면서도 렌게에게 드는 감정이입은 또 다르게 가치있는 느낌이네요. 이 50초의 시간 동안 50초보다 훨씬 긴 흐름의 시간을 느끼기도 하고, 그동안 50초나 시간이 흘렀다는데 놀라기도 하고, 두 상반되는 느낌을 동시에 받으면서 놀라기도 하면서.

이것도 연속된 시간의 흐름인 애니메이션과 단절된 시간의 집합인 만화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시간의 수직적 흐름이겠지요. 만화에서는 같은 장면을 몇 컷에 걸쳐 반복한다고 해도 애니메이션에서 50초에 걸친 클로즈업같은 효과를 주기 어려우니까요. 

아마 먼 훗날에 논논비요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도, 이 클로즈업 장면만은 논논비요리의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감히 말하건데, 애니메이션이라는 수평적 흐름에 묶여 있던 시간을 '수직으로 용솟음치게 만든' 장면으로요.





"수평적 시간에 묶여있는 존재를 해방시키면 시간은 더이상 흐르지 않게 된다. 그것은 수직으로 용솟음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