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16. 01:36ㆍ:: talk
모리라고 불린 남자의 노란 마스크에 뚫린 구멍 사이로 초록빛이 도는 회색 눈이 드러났다. 그가 빤히 쳐다보며 로스스타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하면 공책은 남겨 둘지도 몰라. 솔직하게 대답해 주겠나, 천재 씨?"
"노력해 보지.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나 스스로 천재 운운한 적은 없었어. 《타임》에서 나더러 천재라고 했지."
"하지만 항의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잖아?"
로스스타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만 개새끼라고 생각했다. '잘난 척하는 개새끼. 내가 뭐라고 대답하든 아무것도 남김없이 다 들고 갈 거잖아?'
"내가 궁금한 건 뭔가 하면…… 도대체 왜 지미 골드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느냐는 거야. 왜 너처럼 진흙탕에 얼굴을 처박게 만들었냐 이거지."
워낙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라 로스스타인은 지미 골드가 그의 가장 유명한 피조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로 기억이 된다면) 그는 지미 골드로 기억될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모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로스스타인을 천재로 묘사했던 그 《타임》에서는 지미 골드를 '풍요로운 이 땅의 미국식 절망의 아이콘'으로 규정했다. 헛소리였지만 그 덕분에 책이 팔렸다.
"『러너』로 끝냈어야 했다는 뜻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 말고도 많아."
하지만 그는 하마터면 이렇게 덧붙일 뻔 했다. 『러너, 전쟁에 나서다』 덕분에 그는 미국의 권위 있는 작가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고. 『러너, 속도를 늦추다』 덕분에 작가로서 정점을 찍었다고. 호평이 꽃다발처럼 쏟아졌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62주 동안 올랐다. 그가 직접 참석해서 수상하지는 않았지만 전미도서상도 받았다. '전후 미국의 『일리아드』'라는 것이 선정 이유였는데 마지막 작품이 아니라 삼부작 전체를 두고 한 말이었다.
"『러너』로 끝냈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야. 『러너, 전쟁에 나서다』는 좋았어. 아니, 어떻게 보면 전작보다 더 훌륭했지. 진실했으니까. 문제는 3권이야. 맙소사, 똥밭도 그런 똥밭이 있을까. 광고회사? 아니, 광고회사라고?"
이러고 나서 노란 마스크가 보인 행동에 로스스타인의 목이 막히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색에 잠긴 사람처럼 천천히 노란 복면을 벗어서 보스턴에 사는 전형적인 아일랜드 청년의 얼굴을 드러낸 것이었다. 빨간 머리, 초록빛이 도는 눈, 햇볕에 화상만 입을 뿐 절대 까무잡잡해지지 않는 창백한 피부. 거기에 섬뜩하게 빨간 입술.
"근교의 주택? 진입로에 주차된 포드 세단? 아내와 두 명의 아이들? 누구라도 신념을 버릴 수 있다, 그걸 얘기하고 싶었던 건가? 누구라도 독약을 삼킬 수 있다는 걸?"
"공책을 보면……"
그는 공책을 보면 지미 골드가 등장하는 작품이 두 개 더 있다고, 그로서 서클이 완성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첫 번째 작품에서 지미는 근교 생활의 공허함을 깨닫고 가족, 직업, 코네티컷의 안락한 주택을 버린다. 배낭과 옷가지만 짊어진 채 두 발로 길을 나선다. 학교를 중퇴하고, 돈밖에 모르는 가족을 등지고, 술에 취해서 주말 내내 뉴욕을 배회하다가 입대하기로 결심했던 어린 시절의 그로 돌아간다.
"공책을 보면 뭐? 뭔데, 천재 씨. 말을 해. 왜 지미를 쓰러뜨려서 뒤로 넘어지게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얘기해 보라고."
로스스타인은 그가 『러너, 서부로 떠나다』에서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얼굴을 드러낸 노란 마스크가 이제 체크무늬 재킷 오른쪽 앞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고 있었다. 그는 슬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신은 미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을 창조해 놓고 똥칠을 했어. 그런 짓을 하는 인간은 살아 있을 필요가 없지."
달콤한 깜짝 선물처럼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쓴 글을 한 단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로군."
존 로스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모리는 권총을 겨누었다. 총구가 까만 눈 같았다.
로스스타인은 관절염에 걸린 마디 굵은 손가락을 총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어서 맞대응하고, 모리가 눈을 깜빡이며 살짝 움찔하자 흡족해했다.
"내 앞에서 바보 같은 문학 비평은 늘어놓지 마. 그런 거라면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배 터지도록 들었은까. 그나저나 너 지금 몇 살이냐? 스물둘? 스물셋? 문학은커녕 인생에 대해서 네가 아는 게 뭐야?"
"이 세상에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 정도는 돼." 로스스타인은 아일랜드 출신 특유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을 보고 놀랐다. "지난 20년 동안 독 안에 든 쥐처럼 숨어 지내 놓고 내 앞에서 인생 어쩌고 하는 설교 늘어놓을 생각은 하지 마."
어떻게 감히 문호의 반열에서 이탈할 수 있느냐는 해묵은 비판에 로스스타인은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고 ―페기와 욜랜드라면 익히 알겠지만 유리잔을 던지고 가구를 부술 만한 분노였다― 그래서 기뻤다. 비굴하게 구걸하다 죽느니 노발대발하다 죽는 편이 나았다.
"내 작품으로 어떻게 돈을 벌 작정인가? 생각은 해 봤나? 해 봤겠지. 차라리 헤밍웨이의 공책이나 피카소의 그림을 훔쳐서 파는 게 더 낫다는 것도 알 테고. 그런데 네 친구들은 너보다 무식하잖아. 그렇지? 말투를 들어 보니 알겠더군. 그 친구들도 네가 아는 걸 아나? 분명 모를 테지. 하지만 너는 그 친구들을 속였어. 그림의 떡을 보여주면서 각자 한 조각씩 나눠 먹자고 했지. 내가 보기에 너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청산유수가 될 수 있지. 하지만 깊이는 없을 거야."
"입 닥쳐. 꼭 우리 엄마처럼 얘기하고 있구만."
"어이 친구, 너는 평범한 도둑이야. 그런데 얼마나 멍청하면 팔지도 못할 물건을 훔치나?"
"입 닥쳐라, 천재 씨. 경고했다."
로스스타인은 생각했다. 녀석이 방아쇠를 당기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약을 먹을 필요가 없겠지. 과거에 대해서, 찌그러진 자동차처럼 망가진 인간관계에 대해서 후회할 필요도 없겠지. 숲길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토끼 똥더미처럼 공책을 쌓아 가며 강박적으로 글을 쓸 필요도 없겠지. 어쩌면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수도 있었다. 암이나, 그처럼 평생 번뜩이는 기지로 먹고산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알츠하이머보다 나았다. 물론 헤드라인으로 소개될 테고 그 빌어먹을 《타임》 기사 이전부터 헤드라인이라면 신물이 났지만 ―녀석이 방아쇠를 당긴다면 이번에는 내 기사를 내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겠지.
"너는 바보야." 로스스타인이 말했다. 그는 갑자기 황홀경에 빠졌다. "너는 네가 다른 두 친구보다 똑똑한 줄 알겠지만 아니야. 그 친구들은 최소한 돈은 쓸 수 있는 물건이라는 걸 알잖아." 그가 몸을 내밀고 주근깨가 여기저기 박힌 그 창백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거 아나? 너 같은 녀석 때문에 책 읽는 사람들이 괜히 욕을 먹는다는 거."
"마지막 경고다."
"경고 좋아하시네. 엿이나 먹어라. 날 쏘든지 아니면 내 집에서 나가라."
모리스 밸러미는 그를 쏘았다.
(Finders Keep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