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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또는 사족

Cleos 2023. 10. 23. 22:26

 

 호르헤가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형제들, 그리고 참으로 귀하신 수도원 빈객 여러분, 이 늙은 것이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본 수도원을 연단한 네 주검의 죽음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 있는 자가 저지르는 가장 비참한 죄악의 문제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 엄정한 손길로 우리 지상의 삶을 다스리시는 하늘의 섭리에 따른 죽음이 아니올시다. 여러분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을 것이나, 이 슬픈 사건이 여러분의 영혼을 좀먹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지요. 무슨 까닭인가요?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여러분 모두가 결백할 것이고, 그 한 사람이 처벌을 받고 나면 여러분은 죄 없이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해 슬퍼할지언정, 하느님 법정 앞에서 여러분 자신이 추궁당할 이유도, 해명해야 할 의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얼마나 미친 것입니까?」 이 대목에서 호르헤는 고함을 빽 지른 뒤에 말을 이었다. 「……미쳤다 뿐입니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바보들이에요! 살인을 범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그 죗값을 받게 되는데, 이는 살인자가 하느님의 뜻으로 노릇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기적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예수님을 배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배신자를 저주하시고 통매하시었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그자에 이르러 사람을 죽이고 해침으로써 죄를 저지르는 자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 곧 우리의 교만을 경계할 목적으로 하느님께서 그 손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말을 중단하고 텅 빈 시선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멀어 버린 눈 대신 느낌으로 좌중이 분위기를 읽고 귀로써 좌중의 침묵과 그 침묵의 무게를 감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수도원에는 교만이라고 하는 배암이 오래전부터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무슨 교만이었던가요? 권력으로 인한 교만이었던가요? 속세를 등진 이 산문에 권력으로 인한 교만이라니요? 아니올시다, 그게 아니올시다. 하면 부로 인한 교만? 형제들이여, 청비과 소유에 대한 논쟁이 이 세상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가기 이전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거도 소유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이 있다면 그것은 회칙에 따라 기도하고 근행하는 권리와 의무뿐입니다. 하나 우리 교단의 사명이자 우리 수도원 수도사들의 의무인 이 근행 가운데에는, 공부하고 지식을 보존하는 의무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공부하고 그 지식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의무의 노른자위 같은 것이지요. 나는 <탐구>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보존>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까닭인가요? 하느님께 속하는, 지식이라는 재산은 완전한 것이고, 태초부터 완전한 것으로 정제된 것이고, 말씀의 완전함 아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탐구>라고 하지 않고 <보존>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까닭에서일까요? 선지자들의 설교로부터 초대 교부들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수세기에 걸쳐 정제되고 완성된 이 지식이야말로 인간의 몫으로는 최상의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역사에는 발전이나 진보가 있을 리 없습니다. 오로지 연속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요점 약설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창조에서 부활을 거쳐, 구름 위에 좌정하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리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르기까지 저지할 수 없는 움직임을 계속해 나갑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지식과 신성한 지식은 이런 길을 걷지 않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채같이 단단한 이 지식은, 우리가 겸손하게 귀를 기울일 때만 우리가 걸을 길을 예언하고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내어 줍니다. 그러나 이 길이 지식을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의 하느님께서는, <내가 바로 그 길>이라고 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 진리의 무서운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이 두 마디를 밝히기 위해 선지자들, 복음 전도자들, 교부들, 고승 대덕들이 남긴 말에 지나지 못합니다. 이교도들잉 혹 반대되는 말을 한 바도 없지 않습니다. 이 무지한 이교도들의 말이 우리 기독교에 묻어 든 것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따로 들어 둘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명상하고 닦고 보존할 뿐입니다. 이는 비할 바 없이 찬란한 장서관을 갖추고 있는 우리 수도원이 해온 일이며, 마땅히 해야 했던 일입니다. 동방의 칼리프가 어느 날 그네들의 자랑거리인 어느 유명한 도시의 장서간에다 불을 지르라고 명하고는, 수만 서책이 불타는 걸 보고 마땅히 타야 하는 것, 탈 수도 있는 것이 탄다고 하더랍니다. 그 서책들은 『코란』이 내용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서 필요가 없는 책들이거나, 『코란』에 위배되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유해한 책들이니 모두 태워 없앰이 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신학자들이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의 주석서나 해설서는, 하느님께서 쓰게 하신 성서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 만큼 마땅히 보존되어야 합니다.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 역시 파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책들을 보존해 두어야 후에, 하느님이 정하신 때와 방법에 따라,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고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책임을 밝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수세기 동안 우리 교단이 져왔던 책임과 오늘날 우리 수도원이 진 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분명해집니다. 진리에의 긍지를 가지고, 진리에 맞서는 것을 보존함에도 겸손하고 신중하되 우리 스스로 이로써 더럽혀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형제 여러분, 학승을 유혹할 수 있는 교만의 죄가 무엇인가요? 스스로의 임무를 보존하는 데서 찾지 않고,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지식을 구하는 데서 찾는 허물입니다. 나는 이런 형제엑, 성서의 마지막 권에서, 마지막 천사가 한 말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나느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해 둡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벌하실 때에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서 주실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 무엇을 떼어 버리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 대한 그의 몫을 하느님께서 떼어 버리실 것입니다> 불쌍한 형제들이여, 여러분 보시기에, 이 말이 이 수도원 경내에서 있었던 일을 암시하고, 이 수도원 경내에서 있었던 이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파란을 암시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도시에서 성에서, 자만이 차 있는 대학과 교회에서 당당한 말과 행동으로, 주석서에 이미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는 진리의 의미를 왜곡하고, 겁 없는 도발이나 감행하고, 진리의 말씀에 대한 새 해석이나 목마르게 찾는 이 시대를 상징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거야말로 이 수도원에 잠복해 있었고, 지금도 잠복해 있는 교만이 아닐는지요? 나는 장서관에 숨어들어 제 몫이 아닌 서책의 봉인을 도발하려 했고 지금도 하려 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짓이야말로 주님께서 벌하려 하시었고 앞으로도 벌하실, 용서할 수 없는 교만이라고 해두고자 합니다. 우리가 연약한 탓에 주님께서는 어렵지 않게 복수의 길을 찾으실 것입니다……」